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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클래스, 인물과 사건중심 해석 기독교 역사책

by onlyhim1 2023. 6. 27.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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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역사가 갖는 의의

    하나님이 역사 속에 참여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동네 출신인 예수의 탄생으로 기원전과 기원후가 나뉘는 것을 보면 추상적이거나 순환적인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제자들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작은 공동체가 온 세계로 퍼진 최초의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박해이다. 초대교회의 집사 스데반이 박해로 죽자, 공동체는 박해를 피해 흩어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교는 약 300년 동안 강대국 로마에 강력한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박해의 상당 부분에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깔려있었다. 또한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이들은 로마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 황제 중 네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다. 도미티안과 트리얀은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이때 지하교회인 카타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제2의 세례로 여기며 기꺼이 순교하였다.
    이때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교리에 반대하는 이단들이 생긴다. 성육신을 부정한 영지주의와 율법을 반대한 마르키온주의, 영적 교만과 그릇된 경건주의를 조장한 몬타누스주의가 이 시대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이단에 맞서 신앙고백을 제시했고, 교부와 교리를 통해 전통신앙을 굳건히 다져갔다.

    기독교 안 교리와 분파가 생기다

    이단을 대적하는 것이 교회 외적인 문제라면, 교회 내적으로도 문제가 성행했다. 로마의 박해 때 변절자의 회개를 받아주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노바티안은 배타적이었고, 키프리안은 관용적이었다. 이 문제는 배교한 성직자의 안수를 무효화 시켜 감독의 선출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성례문제는 인효론(도나투스파)과 사효론(카이킬리아누스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지역과 사회적 배경이 분쟁의 큰 작용을 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공인화를 이끈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를 정치에 용하여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지만, 십자가가 박해의 상징이 아닌 승리와 명예의 상징이 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교회 내부 문제까지 직접 관여하며 로마 제국의 기틀을 단단하게 잡아갔다. 도나투스 논쟁과 아리우스 논쟁이 대표적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위대한 대주교

    다니엘 윌리엄스는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각주”라고 평하며 교회 역사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나타낸다. 그는 중세 스콜라 신학자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신비주의 사상가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체계에 유익했으며 복음적이었다. 한때 방탕한 생활에 빠졌던 그를 회심으로 이끈 데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가 큰 영향을 발휘했다고 본다. 그의 저서 『고백록』과 『하나님의 도성』은 당시 이교도들에 대항한 변증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독려한다.

    교회 기득권을 위한 교황과 황제의 싸움

    중세시대는 교황과 수도원제도가 축을 이루어 이끌어 갔다. 중세 최초의 교황 그레고리 1세를 시작으로 권력과 지지를 얻다가 그레고리 7세에 이르러서는 교황권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서임권 문제로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이 싸우다가 결국 카노사에서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으며 굴육을 당하게 된다. 이노센티우스 3세는 교황제도의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과 아비뇽 유수 사건을 거치며 교황권은 점점 쇠퇴되고 교황이 3명이 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 콘스탄트 공의회에서 3명의 교황을 폐위시키고 마르티누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목적은 좋았지만 점점 타락의 길로, 타락의 끝은 개혁

    수도원 운동은 안토니우스의 수도생활로 활력을 얻게 된다. 수도원 중에 유명한 수도원은 서방의 베네딕투스 수도회, 클뤼니 수도회, 시토, 프란체스코, 도미니쿠스 수도회 등이 있다. 이 수도원들은 처음에는 금욕, 질서 유지, 경건 생활로 걸출한 감독을 배출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점차 성직매매, 부유, 영성 강조 등의 문제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세시대 때 이슬람이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차지하고 순례자를 박해하자 동방의 황제가 서방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지원요청을 하며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200년간 지속되다가 제8차 십자군을 거치며 사실상 막을 내렸다. 십자군 전쟁은 동족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분열을 초래했고, 이슬람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학살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희생을 초래했다. 또한 십자군을 발전시킨 면벌부 제도가 교회의 올무가 되어 결국 종교개혁을 자초하였다.
    르네상스 운동은 인문주의 사상을 가져왔고 종교개혁으로 이끌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로 성경번역을 했고, 그가 낳은 종교개혁의 알을 루터가 부화키셨다. 루터는 면벌부를 포함한 로마교회 관습을 반박하며 95개조 조항을 게시했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그의 개혁의 가장 큰 틀이다.

    교회사를 배우며 느낀점

    지금 한국 교회만 해도 수백여개의 교단이 존재하고, 각 교단마다 갖는 교리와 법이 다르다. 한국 교회는 장로회 교회가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통합과 합동교단이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성도수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 두 교단만 봐도 그 차이가 극명하다. 예를 들면 통합은 여성목회자를 인정해 주는데, 합동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각 교단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 해석에 따라 교단의 법과 규칙이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이어져 온 오랜 교리싸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나와 친구의 경우를 봐도 각자 다르고 해석에 따라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도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 그저 서로를 존중해주고 말씀이 상대방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같이 교회사를 배우며 내가 어렸을 적 교회에서 듣고 배운 것이 다 정답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바른 양심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하여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려 한다면 서로가 내린 결론이 각자 다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결론이 교단이 정의한 교리의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교단의 교리또한 이단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결론내린 최적의 답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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