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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간추린 신약과 구약 사이 역사, 신구약 중간사

by onlyhim1 2023. 11. 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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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성쇠의 끝판왕 중간기 역사의 배경

      구약과 신약은 말라기에서 마태복음으로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는 약 400년의 시간이 들어있다. 이 중간기에는 강대한 왕조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두세 차례 바뀌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국가 경계선이 크게 변하였다. 또한 다양한 문화들이 출현하기 때문에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연구와 함께 이 400년의 시간을 잘 알아야 신약의 이해가 더 잘 될 수 있다. 
      중간기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러하다. B.C. 8세기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 6세기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다. 이때 앗수르 제국의 식민정책 중 하나인 혼혈정책으로 사마리아인이 생겨나게 됐고,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됐다. 그리고 이 때부터 유대인이라는 호칭이 생겼는데 이는 바벨론이 남유다를 다른 나라 사람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 이다. 그 유대인들은 바벨론 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변환을 직접 경험했고,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예언처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지 70년 만에 예루살렘 귀환이 이루어졌다.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은 제법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사랑을 잊어버리고 우상과 재물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오히려 하나님이 언제 우릴 사랑했느냐며 반문하자 하나님께서는 400년 중간기의 시간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증명하신다. 또한 이 중간기는 제국의 변동 가운데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되도록 준비된 기간이었다.

     

      페르시아에서 귀환할 때 비교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 부유한 사람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꺼렸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헬라 제국으로 변동을 겪으며 오히려 황폐한 예루살렘보다 안디옥, 다마스쿠스, 리디아, 프리기아, 사데 등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대신 각 마을에 회당을 짓고 율법을 공부하며 산다.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한다. 로마제국 시대에 여행의 자유화가 이뤄지며 1년에 3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며 예루살렘 활성화에 큰 도움을 끼친다. 페르시아-그리스-마케도니아로 주도권이 넘어가며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로 인해 헬라문명이 개시된다. 400년의 중간기 역사 중 260년의 역사에 해당하는 헬라 제국은 헬레니즘을 제국 전체에 퍼뜨린다. 때문에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 제작이 이뤄진다. 유대 본토에서는 일반적인 근동의 통상어인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헬라어 사용을 강요받고 있었다. 또 갈리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북쪽에는 이미 헬라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헬라 제국이 유대를 통치할 때 유대에는 마카비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 후 하스몬 왕조와 헤롯 왕조의 등장과 더불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이 등장한다. 사두개파는 대사장직을 맡고 있었고, 고위 정부관리, 돈 많은 상인 등 사회적 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메시아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언서를 제외한 모세오경만을 율법으로 받아들인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매우 폐쇄적인 집단이다. 바리세인은 헬레니즘으로부터 유대교를 지키기 위한 하시딤에서 유래한 집단으로 볼 수 있고 메시아 왕국, 사후의 생명, 마귀의 천사의 이중성 들을 받아들였다. 종교의식 수준에 있어서는 다른 동족들보다 뛰어나며 율법의 정확한 해설자라는 평가를 들었다. 이들은 구약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책들을 받아들였따. 이들은 소수고 정치적 종파도 아니었지만 율법을 연구하던 서기관과 학자들과 대중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존 스토트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려는 반면, 사두개인들은 무언인가를 빼내는 사람들이랑 정의한다. 이 두 부류는 긴 분쟁으로 수년간 나라를 찢어 놓고, 내란까지 발생시킨다. 에세네파는 하시딤의 신앙을 고백했다는 것에서 바리새파와 공통점이 있지만, 성전이 유대교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에서 차이가 생겨났다. 에세나파는 쿰란에서 은돈한 사람들과 시리아의 동굴, 혹은 요단 강 근처 동굴에서 거주하면서 모두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열심당이라고 하는 젤롯당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은 다양하지만 파이퍼는 바리새파는 하시딤의 후계자라면, 젤롯당은 마카비의 후계자라고 말한다. 

    중간기부터 예수님 시대의 성경배경 역사

      일반적으로 마타디아에서부터 시몬의 통치까지를 마카비 혁명 시기라고 하고, 요한 힐카누스 때부터는 하스몬 왕조라고 부른다. 하스몬 왕조 중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가 죽고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여왕이 된다. 남편의 유언대로 사두개파를 내쫓고 바리새파와 화해하며 바리새파의 권력이 더 높아지게 된다. 어머니가 죽기만을 기다리던 아리스토불르스 2세는 형 힐카누스 2세를 제사장 자리에서 내쫓고 자신의 야망대로 왕과 제사장직을 겸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로마의 영웅 폼페이우스가 전쟁을 떠났다가 유대로 들어오자 두 형제는 서로가 유대의 통치자라고 싸우며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한다. 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두 형제 대신 오히려 로마가 유대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 이로인해 폼페이우스는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 제사는 계속해도 된다고 허락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던 바리세파가 사두개파를 누르는 계기가 된다. 이 싸움의 승자는 힐카누스 2세의 2인자였던 안티파터 이두매인이었다. 그는 유대의 내전에서 로마로 복종한 덕분에 폼페이우스는 그의 두 아들 파라엘루스와 헤롯을 유대 땅 전체의 총독에 임명한다.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의 통치를 위한 싸움은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내전에서 자신을 도와준 힐카누스 2세에게는 그가 원하는 대제사장직을 재확인해주고 유대에 세금을 면제해준다. 그리고 안티파터는 유대의 행정장관 자리를 받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 당하자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는 권력 다툼에 들어간다. 안토니우스가 먼저 힘을 갖게 되자 원래 헤롯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그의 두 아들을 분봉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헤롯에 대한 신뢰가 무척 높았기 때문에 그를 매우 아꼈다.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했던 하스몬 왕조 안티고누스를 잡아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제사장직과 왕의 통치권을 함께 가졌던 하스몬 왕조는 126년만에 완전히 끝이 나고 유대의 권력은 이두매 사람 헤롯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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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은 사실은 탁월한 정치가?

      로마는 식민지인 유대에 독특한 정치를 펼쳤는데, 다신교를 섬겼던 다른 나라와 달리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민족은 그 독특성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에는 분봉 왕과 총독을 세우고, 종교는 유대의 대제사장이 맡도록 했다. 분봉 왕으로 세워진 헤롯은 로마와 유대민족을 만족시켜야 하는 자리였다. 헤롯은 그렇게 자신을 믿어주던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결혼했던 부인과 아들들도 무참히 죽이며 탁월한 정치력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심지어는 아들들에게도 왕권을 세습했다. 총독은 군대 지휘관인데, 유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을 투입하였고, 군대 주둔지도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두었다. 하지만 반란이 일어나면 언제나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끔 전력을 꾸몄다. 군인들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이 아닌 주로 사마리아 지역과 가이사랴 지역에서 징집했다. 예루살렘에는 약간의 수비대만 두었다. 총독의 특별한 권한이라면 사형선고 권한이 있다.
      유대인은 오랜 식민 통치에 익숙해서 다른 부분은 괜찮았지만 종교부분을 건드리면 무섭게 폭동을 일으키고 저항했기 때문에 로마도 종교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유대의 대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들의 권한을 최대한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은 많은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왕들과 정치가들은 이 성전을 주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공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 엄청난 양의 헌금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에게 헤롯은 성전을 확장 증축해줘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샀고, 로마제국에게는 가이사랴 신도시를 개발했다. 유대와 로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탁월한 정치를 펼친 헤롯은 잔인한 왕이기도 했다.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에게 인사하기 위해 온 박사들로 인해 자신의 정적을 발견한 헤롯은 박사들이 찾아온 시점을 기준으로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뛰어났던 헤롯은 죽고 그의 세 아들이 다시 유대를 나눠서 다스리게 되었다. 

    로마 식민지부터 지금의 이스라엘이 세워지기까지

      로마제국의 산물로 식민지의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던 세리가 있다. 이 세리는 성경에도 나오지만 로마의 앞잡이라는 이유로 유대 민족에게 아주 천한 취급을 받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와 같이 로마의 도로와 수도시설은 어느 제국보다 발달되어 있었다. 로마는 식민 국가에 여행의 자유를 허락해주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연에 최소 1회 많게는 3회 예루살렘에 방문해 명절을 보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사형법이다. 예수님은 돌로 처형 당하는 유대의 사형법이 아닌 로마의 사형법으로 처형을 당하셨다. 또한 로마 시민권또한 로마 제국의 산물이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된다. 바울의 경우가 세습된 경우였고, 천부장은 거액의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뒤 로마는 더 이상 분봉 왕을 통한 통치를 그만두고 유대 전체를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로 바꿨다. 하지만 유대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유지하게 해줬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 내는 성전세를 로마가 감독함으로 문제가 생겼다. 그 다음에 황제가 된 이들은 황제 숭배정책과 성전 금고를 건드리며 유대인들의 격렬한 시위와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결국 로마에 패한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진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다 1948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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