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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그리스도식 사랑 주변부 사랑, 마지널리티

by onlyhim1 2023. 10. 1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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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점 개선에 진심인 사람 이정용

    1935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일제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은 이정용은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유학했다. 처음에는 화학을 공부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신학을 전공해 목사와 신학교수가 되었다. 여러 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며 제자양성에 헌신했다. 또한 신학박사를 받은 후 흑인대학 하워드 대학에서 전문사서로 근무하며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고, 한국농촌목회자 평생교육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여 농촌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기도, 오하이오 노스다코타에서는 교회목사로 목회를 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며 느낀 문제점과 모순점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주변에 소외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개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제식민통치부터 이민자까지 중심세력으로부터 착취당하고 무시받는 삶을 살았을 그는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잘 이해했으며 그들의 입장에서 중심부의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냈기에 그의 호소력은 깊었고, 소외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마음을 울리는 위로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주변성 신학은 이민자, 소수자 뿐만 아니라 흑인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에도 괄목할 만한 영향을 주었으며, 주변성 신학에 대해 소개한 책인 ‘Marginality’는 미국 주요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할만큼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고난의 신학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내가 중심부일 때 주변부를 대했던 나의 태도 돌아보기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한국 다문화 가구원은 2019년 이미 100만 명을 돌파했다. 총인구의 3%에 육박하는 비중이다. 자연스럽게 다문화, 난민가정출신 자녀들이 사회 중심 구성원으로 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다문화 가정을 위한 정부의 여러 지원과 제도가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단일민족의 정체성이 강한 한국인들의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심부는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이며 주변부는 각국의 이민자와 다문화 가정과 그들의 문화이다. 특히 제3세계나 개발도상국가 출신의 다문화 가정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주변성으로 내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외된 자를 돌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문화 가정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 빈도수나 비율에 따라 아직은 많이 낯선 그룹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중심부로 들어오려고 할 때, 단일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친 한국인들이 그들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개방되었긴 하지만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았고 한국어를 잘 구사한다고 해도 아직은 깊은 한국의 문화가 생김새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을 주변부로 각인하고 중심부로 통합되는 것을 반기지 않은 눈치이다. 우리가 영어권 국가에서 아시안으로서 차별과 조롱을 경험하며 평등과 인격존중을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소수자의 입장을 공감하며 그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제도와 사회의 문화, 교육이라는 복합적인 요소를 통해 다문화가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이 극복되어야 하겠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사렛 동네 목수 출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변부를 돌아보고 주변부에 속하기를 선택하여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하겠다.
     

    주변부로서 주변성 극복하기

    저자는 아시아계-미국인으로 미국사회에서 전문인으로 살면서도 중심부 미국인의 거부, 배척 등을 경험했다. 이에 그는 중심부로 들어가거나 그들을 역배척 하는 슬로건을 제시하기보다 주변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에 뿌리내리기를 권고하며 주변부에서 주변성을 띄며 고통과 고난을 겪기도 하고 극복하며 살기를 권고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잘 확립해야 한다. 이 시대의 소수민족은 자신의 뿌리에 자부심을 갖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또한 주변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두 세계 사이와 두 세계 모두의 상태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는 주변부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변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주변부 사람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새로운 주변성이라 하며 지배 집단이나 주변부 집단 어느 쪽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에 의존한다. 즉 새로운 주변성의 기준은 다름의 조화이다. 통일이 아닌 조화를 이루며 두 세계를 초월하고 넘어서서 살 수 있다. 배타적 사유는 포용적 사유를 배제하지만, 포용적 사유는 배타적 사유를 포함한다.
     
    특별히 교회는 중심부적 가치를 스스로 비우는 ‘케노시스’ 교회가 되어야 한다. 중심성의 중심에 있는 교회가 죽어야 주변성의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죽음 없이는 부활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낡은 교회의 죽음 없이는 새로운 교회의 부활도 없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철저히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도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중심주의적 전통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중심 중의 중심에 있으려는 인간적 경향, 그 치명적인 중심주의 경향이 교회를 통제하는 한 교회는 결코 스스로 변화될 수 없다. 정통주의 안에서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노력하기 보다 예수가 이루었던 주변성의 근본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한 것처럼 철저한 개혁에 직면해야 한다. 교회 안 그리스도인은 중심에 머물고 경쟁자를 배척하고자 하는 중심부적인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여 관심받지 못하고, 거부당하고, 약한 자들 곁에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주변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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